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세계 대전 (문단 편집) == 기타 == * 워낙에 거대한 전쟁이다보니 세계 최대/세계 최초에 이름을 올린 것들이 많다. * [[독소전쟁|세계 최대의 단일 전쟁]] * [[노르망디 상륙작전|세계 최대의 상륙 작전]] * [[쿠르스크 전투|세계 최대의 전투]][* 소수설이긴 하지만 세계 최대의 전투로 [[모스크바 전투]]를 꼽는 이들도 있다.] * [[한니발 작전|세계 최대의 철수작전]] * [[스탈린그라드 전투|세계 최대의 사상자를 낸 전투]] *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. 일단 역사학계의 대세론 자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세계 최대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투로 간주하지만, 당시 집계된 소련이나 독일의 사료가 매우 부족한 관계로[* 그나마도 독일 측 사료는 전쟁 막판에 죄다 파기되거나 소실되었고 소련 측 사료 역시 현재까지 온전히 남은 건 적다.] 역사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다. 당장 인터넷에 검색만 해 봐도 웹사이트나 자료마다 [[레닌그라드 포위전]], [[대륙타통작전]], [[바르바로사 작전]], [[베를린 전투]] 등 세계 최대의 사상자를 낸 전투는 매번 달라진다.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전술했듯이 사료 부족의 문제도 있고,[* 특히 중국의 경우 정말 심각할 정도로 사상자 관련 자료가 부족해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방해한다.] 이 "사상자" 개념에 전투 도중 사망한 민간인을 포함시키느냐의 여부 때문이다. 상당히 물론 순위권에 드는 전투들이 거의 대부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벌어진 전투라는 대에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다. * [[바그라티온 작전|세계 최대의 공세]] * 여기도 논란이 있는데 이 부분은 "세계 최대의 공세"라는 뜻 자체가 중점을 과연 병력수에 두느냐 아님 동원한 총 장비의 숫자에 두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. 일단 바그라티온 작전이 세계 최대의 공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르바로사 작전과 비교하여 추축국이 동원 병력(사단) 이 훨씬 더 많았다는 논리로 밀고 나가며,[* 바르바로사 작전 때 추축국은 약 380만명의 병력을 동원했다. 참고로 바그라티온 작전 때 소련군은 이의 절반이 안되는 약 160만명을 동원했다.] 세계 최대의 공세가 맞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소련군이 동원한 전차와 포병, 항공기 전력이 더 많았다는 논리를 내세운다.[* 바그라티온 작전 때 소련군은 약 6,700대의 전차, 32,700문의 야포, 7,700 기의 항공기를 동원했다. 참고로 바르바로사 작전 때 추축국은 약 3,700대의 전차, 23,000문의 야포, 그리고 5,300기의 항공기를 동원했다.] 판단은 각자의 몫. * [[태평양 전쟁|세계 최대의 전선]] * [[레이테 만 해전|세계 최대의 해전]][* 동원된 함선들의 총 톤수를 계산했을 때 기준. 여담으로 해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[[전함]]의 참전 숫자만 집계한다면 [[유틀란트 해전]] 쪽이 앞선다.] * [[바르바로사 작전|세계 최대 규모의 사단이 동원된 단일 작전]] * [[히로시마·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|세계 최초의 핵무기 실전 사용]] * 사실상 근대 서구 문명이 만들어 놓은 모든 사조들이 복잡하게 얽혀 폭발한 전쟁이다. 쇠퇴한 왕정에서 막 파생된, 연약한 민주주의 사이에서 대공황을 딛고 자리잡아버린 극우 파시즘과 그에 결합한 우생학/극단민족주의,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공산주의와 그에 반작용으로 오는 반공의 기조, 자유민주주의, 제국주의와 상반되는 의미의 민족주의까지 섞여들어간, 그야말로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해버린 전세계적 사조 충돌의 현장이다. 특히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독소전은 파시즘과 공산주의 간의 극렬한 이념 대립+인종/민족주의가 혼재되어 유례없이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다. 1차 대전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전근대의 패권/영토싸움(간단히 말해서 땅따먹기)의 연장선으로 비교적 대결 구도가 단순하지만 2차 대전은 어느 정도 신념전쟁의 형태를 띄었고 그것도 냉전과는 달리 다극적 형태였다. 서로에 대한 상상초월한 광기와 극렬한 증오가 파생되었던 건 이 때문이다. 한 나라에서도 여러 세력이 갈려서 외세를 끌어들이고 서로 대립하고 뒷통수치고 싸우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. 이 전쟁을 계기로 극단민족주의/우생학[*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진화론과 결부된 우생학은 당시 유럽 내 지식인들 사이에도 만연했고 이는 독일만의 경우가 아니었다.]에 기반한 파시즘 세력은 퇴조했고 이때 식민지인들이 전투에 많이 참여한 것을 계기로 제국주의도 같이 쇠퇴했다. 그 후 세계는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/공산주의로 이분화되었고,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가 주류 사상이 되었다.[* 공산권도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였다. 실제로는 아니었지만.] * 제2차 세계 대전은 [[유럽]] 일대로 국한된 [[제1차 세계 대전]][* 물론 중국, 아프리카, 오세아니아, 남아메리카 등지에서도 교전이 있었지만 단지 부대 단위의 소규모 교전, 도시 규모의 공방전이거나 해전 정도가 전부 였으며, 유럽과 같은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.]과 달리 전 세계가 전장이 되었는데[* 애초부터 처음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보다는 '대전쟁(The Great War)'라는 명칭이 더 널리 사용되었다. '세계 대전'이라는 명칭이 당시에도 없던 것은 아니나, 자주 사용되기 시작한 건 2차 대전 전후이다.] 유럽 뿐만 아니라 [[아프리카]], [[아시아]], [[오세아니아]]의 국가까지 개입한 뒤 각자 [[북아프리카 전선]]과 아시아-태평양 전선으로 모두 직접적인 전장이 되었다. 아메리카 대륙 또한 [[진주만 공습]]을 당한 미국을 제외해도 해안가나 주요 항로가 추축국 잠수함들의 게릴라전에 시달렸으며[* 미국 동해안에서는 상선의 대잠전(해군 함대가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잠수함을 제압하는 것이 아닌, 물자를 수송하는 선단이 자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하는 대잠전)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미 해군을 상대로 유보트가 미 동부 해안으로 대규모로 밀어닥쳐 엄청난 손실이 발생했고 미국 서해안이었던 [[알래스카]]에서는 [[알류샨 열도 전역|아예 일본군이 상륙해서 알래스카 남부의 섬들을 14개월 간이나 점령]]했다.] 남아메리카에서는 다수의 병력을 유럽으로 파병한 브라질이 있고, 칠레 역시 미국으로부터 수차례 전함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받았다.[* [[진주만 공습]]으로 태평양에 배치된 미국 전함들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미국은 [[캐나다급|칠레의 전함]]을 대여하려고 시도했다. 다만 칠레는 자국 안보공백을 이유로 거절.] * 현재 공식적으로 생존한 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들은 세계에 100만 명 이상이다. 2020년 기준 미국에만 30만 명 이상 생존하고 있으며 [[밴드 오브 브라더스]]와 같은 전쟁 드라마도 이들 생존한 참전용사들 덕택에 실현되었다.[[https://www.pewresearch.org/fact-tank/2020/05/08/on-75th-anniversary-of-v-e-day-about-300000-american-wwii-veterans-are-alive/|#]] 제2차 세계대전보다 약 25년 전에 벌어진 [[제1차 세계 대전]] 참전용사들이 2020년까지 살아있지 못한 것과는 대비된다.[* 다만 1차 세계 대전은 참전국과 참전 병력 수가 2차 세계 대전보다 훨씬 적었고, 의료수준 역시 더욱 열악하였으며 2차 대전이 한 세대 이후의 전쟁임도 감안해야 한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